in mid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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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에 밖에 나가 딸기를 사왔다. 식탁 위에 올려놓으니 갑갑한 공기 위에 풋풋하고 달큰한 향이 퍼졌다. 그 냄새가 좋아 일인용 소파 위에 한참을 어슷이 늘어져 있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우유를 잔뜩 넣어 마살라차이를 끓이고, 크림치즈 페스트리와 딸기를 씻어 티트레이에 올려놓았다. 소파 발치에 방석을 깔고 주저앉아 연애시대 첫 화를 틀었다. 스틸. 두 사람 사이에 붉은 실이 공처럼 엉켜있다. 영제가 Alone in love네. 작중 등장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시대를 세월을 실감하며 소파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벽엔 굵은 펄이 박혀 있어 불을 끄고 티비를 켜면 어두운 가운데 그 빛에 반짝이며 떠오른다. 별처럼.
갑자기 왜 이 드라마가 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좋은 평들에도 전혀 볼 생각이 없었는데. 2006년 작이라고.
2006년에 갖고 있던 것 중 아직까지 손에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비운 홍차캔 정도다. 그 해 받았던 반지도 말도 가는 물줄기에 손을 빠져나가 버렸다. 약지에 끼운 반지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굴렸다. 건반을 두드리는 날이 해에 며칠 되지 않아도 나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어서 반지는 탐낸 일이 없었다. 손가락에 감긴 이질감은 무거우니까. 몇 해 동안 상자에서 잠자고 있던 반지는 막상 껴보니 열 손가락에 모두 들어갈 만큼 헐렁했다. 빠지지는 않지만 손가락에서 빙글빙글 돌아갈 만큼 헐거웠다. 나에 대한 것은 모두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어쩌면 이 간격은 내가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굳은살과 피가 엉긴 딱지, 자취를 감춘 간격, 그 간격들.을 헤아리는데, 뾰족하게 성을 내던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내 팔에 감겨왔다. 떠보는 말들과 시선이 헐거운 반지처럼 엉성하게 공기를 떠다녔다. 전부 다 헛소리다. 친한 척 부르고 찾지만, 어쩌면 우러러보고 동경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철창 안 맹수를 보며 감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강 건너 불구경, 아니 불씨를 던지고 싶은 거야. 강을 사이에 두고 자신이 던진 불씨가 타오르는 걸 보며 즐거워하고 싶은 거야. 속이 울렁거리는데 그 헛소리에 그 애는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고, 나는 자신을 비웃으며 그 말마저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만다. 모든 것은 너무나 덧없다. 그 중에 사람이 제일 덧없다. 2010년의 나는 그렇게 속으로 자신에게 되뇌며 한쪽 어깨와 팔을 점령한 뜨끈한 것을 토닥이고, 너는 걔만큼이나 따끈따끈하네, d를 생각하고. 손 안을 빠져나간 것들을 생각하고.
잃은 것들을 생각하고, 움켜쥐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고, 놓아버린 것들을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는 자신을 향해 쓴웃음 짓고.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소리가 멀리서 울리듯 들렸다. 화면을 끄고 거실 창밖의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프레임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했고 언제나 가능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의 감각은 아지랑이처럼 아득하다. 현실보다 무거운 꿈의 무게를 가진 내가,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얼얼함 사이로 두려움이 스며들어왔다. 나는 그 느릿하고 선명한 감각을 실감하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했다. 강해지는 것, 그것만에 기대어 많은 계단을 밟아왔는데 무엇 때문에 강해지겠다고 결심했는지 잊어버렸다. 강하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허물어졌다. 몇 번이나 조각나고 부서지고 허물어졌다.
밤거리를 헤매는 대신 단어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된 일이다. 구겨진 깡통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자신에게 부리는 어리광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어릴 적부터 자존심이 아주 센 아이였던 나는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혼나도 용서를 빌지 않았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빈한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해 혼자서도 울지 않았다. 울 수 있었던 것은 꿈꾸고 있을 때,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자신을 잊을 때나 가능했다. 캄캄한 밤이 내리면, 어둠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이 숨이 어둠 속에서 흩어지길 녹아서 사라지길 빌면서 이내 어리광을 마음껏 부렸다.
기대와 불안을 토해내며. 밤에 감싸인 채로.
그는 새벽을 닮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고 깊은 밤, 고요, 적막, 감미로움, 맑음, 서늘함. 밤의 정점으로부터 아침까지 딱 한 발자국을 옮긴, 푸른색의 얇은 베일을 두르고 있는 밤, 밤, 새벽. 그는 아침이 올 거라고 말한다. 당연하다고 말한다. 아니, 사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알게 할 뿐이다.
나를 낮달로 만든 것은 나 자신이어서, 진창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가짜여도 흉내여도 훔친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버려지는 게 두려워 필요를 증명하려 애쓰고, 휘둘리고, 견디는 게 괴로워 자신을 속이고 외면하고, 측량하고 계산하고, 놓는 연습을 하고, 거래하고, 빠져나가면서. 꿈으로 도망쳤다. 꿈보다 옅은 감각의 현실에서 나를 상처입힐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꿈은 깨면 그만이라 나는 언제나 깨어있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로 유령처럼 언저리를 배회했다. 진짜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고, 가능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이 싫어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게으름과 오만함과 피로가 그를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가진 것을 시간을 내일을.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우리가 진짜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물었다.
2011년 7월 17일에 그에게 빌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는 하나는 그 애에게 진짜를 주겠다고 다짐했다. 뭐가 됐든 딱 하나는. 하지만 그 애는 아무것도 고르질 않고 내게 바라는 걸 원하는 걸 묻는데, 나는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모래알갱이가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초조할 뿐이어서. 변하지 않을 잃지 않을, 영원을 입에 올리는 그 애를 나는 비웃으면서도 안타까워하고, 걱정하고, 끝을 준비하는 내 모습에 너는 실망하고.
기대는 실망을 이고 다닌다. 원하는 마음만큼 두려움의 무게를 져야 한다. 가진 근력이라고는 오기뿐었다. 분노할 때나 발휘되는 오기. 모든 건 변하고 사라지고 죽고, 잃고. 당연한 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2011년 11월 25일, 나는 새벽의 끝을 보았다. 밤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오르면서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어렸던 것, 그 어림에 안주한 것, 그림자를 쫓은 것, 그러기 위해 자신을 그림자로 만든 것, 무게를 달아 자신을 나눈 것, 그러려고 한 것, 불안을 전가한 것, 그 영향을 알지 못했던 것을. 그에게, 나에게, 그 애에게. 대단한 강함은 갖지 못해도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한 것을 찌르지 않을 강함이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늠하고 측량하고 소모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고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지쳐버렸다고 몇 번이나 꿈에서 d에게 말했던가. 네가 이겼고, 나는 졌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은 부스러져 허물어지기만 한다고. 이제는 나 자신을 지탱할 힘도 남아있지 않다고. 아무리 굳게 다짐하고 결심해도 허물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어서, 그 고통이 주는 무력함이 너무 괴롭고, 몇 번이나 겪어도 조금도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녹아서 사라질 수 없다면 갈기갈기 찢어져서라도 사라지고 싶다고.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자신을 저울 위에 매달았는지.
어쩌면 나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썩어버린 게 아닐까. 그게 무서워서. 남의 상처는커녕 내 상처도 제대로 마주 대할 수가 없는데. 얼어버리기 위해 달릴 뿐. 늪이 진창이 될 바에야 얼어서 부서지고 싶어요. 누구에게 비는지.
이 수렁에, 끈적한 어둠에, 먹먹한 밤에 끝은 있을까. 믿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라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도 올려다볼 별은 없고, 이 날들은 누구도 대신 밟아줄 수 없는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여서, 두려울 뿐.
내가 진짜가 될 수 있을까. 진짜를 줄 수 있을까 받을 수 있나 가질 수 있나. 우리가, 진짜가 될 수, 있을까.
손에 닿을 수 있을까.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찢어버리는 것을 택하지 않았으니 남은 것은 장을 넘기는 것 뿐. 무엇이 쓰여있을지 알 수 없고, 또 내가 무엇을 적을지 알 수 없는, 백지, 백지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어둠에 새벽이라 이름 붙이고 고작 한 걸음 내딛는 것 뿐. 겹겹이 쌓인 먹먹한 어둠을 헤아립니다. 다음 악장이 오기 전까지, 자신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그 때에까지.